목차




▲ Christ on the Cross (ca. 1615–20) — Cecco del Caravaggio (Francesco Buoneri)
▲ The Calling of Saint Matthew (ca. 1625–30) — Giovanni Battista Caracciolo
▲ Head of an Old Woman (after 1610) — Orazio Borgianni
▲ The Denial of Saint Peter (1610) — Caravaggio (Michelangelo Merisi)
▲ Christ on the Cross (ca. 1615–20) — Cecco del Caravaggio (Francesco Buoneri)
▲ The Calling of Saint Matthew (ca. 1625–30) — Giovanni Battista Caracciolo
▲ Head of an Old Woman (after 1610) — Orazio Borgianni
▲ The Denial of Saint Peter (1610) — Caravaggio (Michelangelo Merisi)
1. 1606년 5월, 로마에서 일어난 일
2. 카라바조의 빛. 테네브리즘
3. 죽음과 폭력을 그린 이유
4. 도망자의 마지막 5년
5. 38세에 죽은 화가가 남긴 것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1571~1610). 이름이 길다. 대부분 '카라바조'로 불린다.
그는 사람을 죽였다.
1606년 5월 28일, 로마에서 공 게임 도중 싸움이 일어났다. 칼을 빼들었다. 상대방이 죽었다. 카라바조는 로마에서 도망쳤다.
살인자였다. 그리고 그 전후로 그는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한 명이었다.
1606년 5월, 로마에서 일어난 일
피해자는 라누치오 토마소니라는 인물이었다. 도박 빚 문제가 있었다는 설이 있다. 정확한 경위는 불분명하다.
카라바조는 교황의 사면이 필요했다. 사면을 기다리는 동안 나폴리, 몰타, 시칠리아를 전전했다. 몰타에서는 기사단에 입단했다가 다시 싸움을 일으켜 쫓겨났다.
▲ 카라바조,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1598~1599년, 로마 국립고대미술관 소장.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도망 다니면서도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 작품 중 일부가 그의 후기 대작으로 평가받는다.
카라바조의 빛. 테네브리즘
카라바조 이전 회화는 달랐다.
르네상스 회화는 빛을 균일하게 사용했다. 모든 것이 적당히 밝았다. 인물들은 고요하고 이상화된 모습이었다. 배경은 풍경이나 실내였다.
카라바조는 완전한 어둠을 사용했다. 배경이 검다. 인물이 어둠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빛은 한 방향에서만 온다. 스포트라이트처럼.
이 기법을 '테네브리즘(Tenebrism)'이라고 한다. 이탈리아어 tenebroso(어두운, 음산한)에서 왔다. 카라바조가 만든 방식이다.
이 명칭은 나중에 생겼고, 카라바조 자신은 그냥 자신이 보는 방식을 그렸다. 여관이나 지하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빛이 창으로 하나만 들어오는 환경에서 작업했다.
죽음과 폭력을 그린 이유
카라바조의 그림에는 폭력이 자주 등장한다.
골리앗의 목을 벤 다윗,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세례 요한의 참수. 구약성서의 장면들이지만 카라바조는 그 순간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그렸다. 피가 흐른다. 얼굴이 일그러진다.
특히 이상한 그림이 있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1610년경). 다윗이 잘린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데, 골리앗의 얼굴이 카라바조 자신의 얼굴이다.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다니던 시기에 그린 그림이다. 자신의 얼굴을 잘린 머리로 그렸다.
자기 처벌인지, 고백인지, 아니면 사면을 바라는 은유인지. 해석은 여러 가지다.
도망자의 마지막 5년
사면을 받기 위해 로마로 돌아오려 했다.
1610년 7월, 포르토 에르콜레 해변에서 발견됐다. 열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이 38세 또는 39세였다. 사면을 받기 불과 며칠 전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교황의 사면장이 이미 발부됐는데 카라바조가 죽었다는 설이 있다. 사실 여부는 불명확하다.
그의 유해는 오랫동안 행방불명이었다. 2010년 포르토 에르콜레에서 유해가 발굴됐고, 2019년 DNA 검사를 통해 카라바조의 것으로 추정한다는 결론이 났다. 400년 만이었다.
38세에 죽은 화가가 남긴 것
카라바조의 작품은 약 80점이 전해진다. 짧은 생애치고 적지 않다.
그가 끼친 영향은 측정하기 어려울 만큼 크다. 렘브란트, 루벤스, 벨라스케스, 조르주 드 라 투르. 17세기 유럽 회화의 상당 부분이 카라바조의 빛에 영향을 받았다.
미술사가들은 카라바조를 '바로크 회화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살인자였다. 도망자였다. 술집에서 싸움을 자주 일으켰다. 감옥에도 갔다.
그리고 서양미술의 방향을 바꿨다. 이게 사실이라는 게 좀 당황스럽다. 살인자가 미술사를 만든다는 게.
※ 이미지 출처
- Judith Beheading Holofernes, Caravaggio, 1598-1599, 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 Rome.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관련 글: [드가의 발레리나](링크) |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링크)
6. 카라바조 이전과 이후. 명암이 달라진 순간
카라바조가 등장하기 전 유럽 회화에서 빛은 공간을 고르게 밝히는 것이었다. 인물들은 모두 잘 보였고, 배경도 선명했다. 르네상스 회화의 미덕은 명확함이었다. 구성이 논리적이고, 인물의 표정이 이상적이었으며, 신성한 주제는 빛나는 색채로 표현됐다.
카라바조는 이것을 뒤집었다. 그는 그림의 대부분을 어둠으로 채웠다. 빛은 화면의 일부분에만 집중됐다. 그 빛을 받는 부분은 극도로 사실적이었다. 주름진 피부, 더러운 발바닥, 촛불에 그을린 손. 신성한 주제를 그렸지만 인물들은 거리의 사람들처럼 생겼다. 로마 교황청은 카라바조의 그림 일부를 거절했다. 너무 비천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카라바조의 방식은 이후 유럽 전체로 퍼졌다. 렘브란트, 루벤스, 벨라스케스 모두 카라바조에게서 빛과 어둠을 배웠다. 지금 우리가 '극적인' 그림이라고 부르는 것들의 상당수가 카라바조의 계보 안에 있다. 그는 그림의 문법을 바꾼 사람이다.
7. 살인과 그림. 카라바조의 도주 시절
1606년 카라바조는 로마에서 라누치오 토마소니라는 남자를 칼로 찌러 죽였다. 도박 다툼이었다는 설과 테니스 경기 분쟁이었다는 설이 있다. 어떤 이유였든 카라바조는 살인자가 됐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로마에서 도망쳐야 했다.
이후 4년 동안 카라바조는 나폴리, 몰타, 시칠리아를 떠돌았다. 도주 중에도 그림은 계속 그렸다. 이 시기의 작품들에는 달라진 것이 있다. 폭력의 묘사가 더 직접적이고 강렬해졌다. 도주 전의 작품들도 폭력적인 장면을 많이 그렸지만, 이 시기에는 뭔가 다른 절박함이 있다.
1610년 카라바조는 사면을 기다리며 나폴리에서 로마로 향하다가 해변에서 사망했다.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다. 열병, 부상, 혹은 암살. 향년 38세였다. 그가 남긴 작품은 60점 남짓이다. 짧은 생애, 격렬한 삶, 그리고 미술사를 바꾼 그림들.
8. 이 그림 앞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
카라바조의 그림을 오래 보고 있으면 불편해진다. 그것이 의도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르네상스 그림들은 고요하고 이상적이었다. 보는 사람이 편안함을 느끼도록 설계됐다. 카라바조는 반대다. 그의 그림은 관람자를 불편하게 만들려는 것처럼 보인다.
〈다윗과 골리앗〉에서 다윗이 들고 있는 머리는 카라바조 자신이라는 해석이 있다. 사면을 기다리며 죄책감을 느끼는 자신의 초상을 잘린 머리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자기혐오와 반성의 그림이라면, 그 불편함은 화가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것이다. 관람자가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그 감정이 전달됐기 때문이다.
좋은 그림은 반드시 아름다울 필요가 없다. 진실에 가까워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카라바조의 그림은 인간의 폭력성, 도덕적 복잡함,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인간 조건에 가깝다. 그래서 불편하고, 그래서 오래 기억된다.
9. 카라바조를 찾아 로마를 다니는 사람들
로마에는 카라바조의 그림을 따라 교회를 돌아다니는 여행자들이 있다.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에 가면 세례 요한의 생애를 그린 세 점이 있다.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에는 〈성 바오로의 개종〉이 있다. 빌라 보르게세 갤러리에는 〈다윗과 골리앗〉이 있다.
이 교회들을 걸으면 카라바조 그림의 특징이 다르게 보인다. 성당 안의 실제 빛, 실제 공간에 놓인 그림들을 보면 카라바조가 얼마나 그 맥락에 맞게 그림을 설계했는지가 느껴진다. 어두운 성당 안, 좁은 채광에서 빛을 받는 그림은 화집에서 보는 것과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미술관에서 조명을 받으며 보는 그림과, 어두운 성당에서 실제 빛 안에서 보는 그림은 같은 그림이 아니다. 카라바조는 후자를 위해 그림을 설계했다. 그리고 그 설계가 400년이 지난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
9. 카라바조의 폭력적인 삶
카라바조는 그림만큼 삶도 극적이었다. 1606년 테니스 시합 후 시비가 붙어 상대방을 살해했다. 로마에서 도망쳐 나폴리, 몰타, 시칠리아를 떠돌았다. 몰타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지만 다시 시비가 붙어 갇혔다가 탈출했다. 가는 곳마다 싸움과 부상이 따라다녔다.
1610년 로마로 돌아오던 중 사망했다. 38세였다. 열병이었다는 설, 의도치 않은 부상이었다는 설, 납 중독이었다는 설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살인자이자 천재였던 카라바조의 삶은 그의 그림만큼 빛과 어둠이 극단적으로 공존했다.
10. 카라바조 이후의 카라바조주의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을 '카라바조주의자(Caravaggisti)'라고 부른다. 렘브란트, 루벤스, 라 투르, 호세 데 리베라. 이들 모두 카라바조의 명암법에서 배웠다. 카라바조 자신은 이탈리아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지만, 그의 방법론은 전 유럽에 퍼졌다.
바로크 시대의 핵심 미학인 '극적 조명'은 카라바조에서 시작됐다. 이후 영화, 사진, 연극 조명까지 이 유산이 이어진다. 강한 광원 하나로 대상을 어둠 속에서 꺼내는 방식. 카라바조가 400년 전에 만든 언어가 여전히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