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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ㅣ예술인문

고야의 1808년 5월 3일 — 총살을 그린다는 것

by 미술에 취하다 2026. 4. 26.

목차

Ferdinand VII (1784–1833), When Prince of Asturias

▲ José Costa y Bonells (died l870), Called Pepito (ca. 1810) — Goya (Francisco de Goya y Lucientes)

▲ Tiburcio Pérez y Cuervo (1785/86–1841), the Architect (1820) — Goya (Francisco de Goya y Lucientes)

▲ The Spanish Singer (1860) — Edouard Manet

▲ Ferdinand VII (1784–1833), When Prince of Asturias (ca. 1800) — Goya

1. 1808년,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

2. 흰 셔츠의 남자

3. 고야는 어느 편이었나

4. 전쟁의 참화. 판화 연작

5. 이 그림이 근대 전쟁화를 바꾼 방식

 


 

▲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 1814년, 프라도 미술관 소장.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는 이 그림을 1814년에 그렸다.

 

사건이 일어난 건 1808년이었다. 나폴레옹 군대가 스페인을 점령했고, 5월 2일 마드리드 시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프랑스 군대가 진압했다. 5월 3일, 체포된 반란 가담자들이 마드리드 외곽 언덕에서 총살됐다.

 

고야는 이 장면을 6년 후에 그렸다. 기억과 보고를 바탕으로.

 


 

1808년,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공

 

나폴레옹은 1808년 스페인을 점령하고 자신의 형 조제프를 왕으로 앉혔다. 스페인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란이 일어났고, 스페인 독립전쟁이 시작됐다.

 

5월 2일의 마드리드 봉기는 그 시작점이었다. 시민들이 맨손으로 또는 칼로 무장하고 프랑스 기병대에 맞섰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싸움이었다. 진압됐다. 다음 날 체포된 사람들이 처형됐다.

 

고야는 이 과정을 목격했다. 또는 목격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당시 스페인 왕실 궁정화가였다.

 


 

흰 셔츠의 남자

 

그림의 중심에 흰 셔츠를 입은 남자가 있다. 두 팔을 벌리고 있다. 왼 손바닥에 상처가 있다. 그리스도의 성흔을 연상시킨다.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지만, 자세는 묘하게 당당하다.

 

그 옆과 뒤에는 이미 쓰러진 사람들이 있다. 또 총에 맞아 쓰러지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앞에는 총을 겨눈 프랑스 병사들이 있다. 병사들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등을 돌리고 있다. 균일한 자세로 줄을 서 있다.

 

이 구도가 인상적이다. 총살당하는 쪽은 개인이다. 각자의 얼굴이 있고, 공포가 있고, 기도가 있다. 총을 쏘는 쪽은 군집이다. 얼굴도 없고, 감정도 없고, 기계처럼 움직인다. 폭력을 행사하는 쪽을 비인간화함으로써, 피해자의 인간성을 더 부각시키는 방법이다.

 


 

고야는 어느 편이었나

 

여기서 고야의 개인적 입장이 복잡하다.

 

고야는 나폴레옹의 침공 이전부터 계몽주의 사상에 공감했다. 스페인의 봉건적 구체제보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이 진보적이라고 생각했다.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점령했을 때 그 정권 아래에서 계속 일했다. 프랑스 측 인사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러나 동시에 스페인 민중의 참상을 보았다. 스페인 사람들이 저항하다 죽는 것을 보았다. 〈1808년 5월 3일〉은 그 충돌에서 나왔다.

 

고야는 이 그림을 제목 있는 '전쟁화'로 그리지 않았다. 영웅화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 옳다는 주장도 하지 않았다. 단지 총살당하는 사람을 보여줬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전쟁의 참화. 판화 연작

 

고야는 같은 시기에 〈전쟁의 참화(Los Desastres de la Guerra)〉라는 판화 연작도 제작했다. 82점짜리 연작이다.

 

이 판화들에는 그림으로 그리기 어려운 장면들이 있다. 학살, 강간, 기아, 시체 더미. 제목들도 직접적이다. "이것을 봤다", "나는 이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것도".

 

이 판화들은 고야 생전에 출판되지 않았다. 너무 위험한 내용이었다. 사후에야 공개됐다.

 

〈1808년 5월 3일〉은 그 판화 연작과 같은 문제의식에서 나왔지만, 기념비적인 크기(268cm × 347cm)를 가진 유화다. 판화는 개인의 기록이고, 이 그림은 역사를 향한 증언이다.

 


 

이 그림이 근대 전쟁화를 바꾼 방식

 

이전까지의 전쟁화는 승리를 그렸다. 용감한 군인, 기마 장군, 정복의 장면. 전쟁의 명예와 영광이 주제였다.

 

고야는 패자를 그렸다. 죽어가는 민간인을 그렸다. 전쟁을 찬양하는 대신 전쟁이 인간에게 무엇을 하는지를 그렸다.

 

이 방향은 이후 피카소의 〈게르니카〉까지 이어진다. 〈게르니카〉의 구도와 주제. 민간인 학살, 공포에 질린 인물들, 묵시록적 혼돈. 는 고야의 유산이다. 피카소는 고야를 직접 언급한 적이 있다.

 

전쟁을 그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 그림은 아직도 그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이미지 출처

- The Third of May 1808, Francisco Goya, 1814, Museo del Prado, Madrid.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관련 글: [피카소 게르니카. 1937년 4월 26일](링크) | [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대관식](링크)

 

6. 고야가 이 그림을 그린 시점

Tiburcio Pérez y Cuervo (1785/86–1841), the Architect

고야가 〈1808년 5월 3일〉을 그린 것은 실제 사건으로부터 6년이 지난 1814년이었다. 그 사이 스페인은 나폴레옹 군대의 점령과 독립 전쟁(1808~1814)을 겪었다. 페르디난도 7세가 복위하자 고야는 왕에게 이 그림을 그리겠다고 청원했다. 마드리드를 지킨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서라고 했다.

하지만 고야의 그림은 영웅적 서사가 아니다. 저항군 지도자나 승리한 전사를 그리지 않았다. 대신 총살당하는 순간을 그렸다. 무기도 없고, 군복도 없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장면. 이것이 독립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방식이었다면, 고야의 승리 기념은 우리가 아는 것과 달랐다.

고야는 당시 68세였고, 귀가 거의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그는 청력을 잃은 후 내면의 공포와 어둠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그림도 그 맥락에 있다. 전쟁의 공포, 죽음의 공포, 권력에 의해 짓밟히는 개인. 고야는 그것을 직시했다.

7. 흰 셔츠의 남자. 익명성의 힘

그림의 주인공은 이름이 없다. 흰 셔츠를 입고 팔을 벌린 남자. 그가 누구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것이 이 그림의 힘이다. 특정 인물이 아니라 그 상황에 처한 모든 인간이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다는 것.

팔을 벌린 자세는 의도적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연상시킨다. 무릎을 꿇은 자세도, 빛이 그를 향해 내리꽂히는 방식도. 고야는 이 익명의 스페인 시민을 순교자로 표현했다. 그 순교는 종교적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것이다. 권력에 의해 이유 없이 죽는 사람들.

그 옆에 있는 사람들도 본다. 두려움에 떠는 이, 얼굴을 가리는 이, 이미 죽어 쓰러진 이. 이 그림은 총살당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앞에 줄 서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것이 이 그림이 특정 역사적 사건의 기록을 넘어 보편적인 반전 이미지가 된 이유다.

8. 총살 부대의 익명성

총을 겨누는 병사들은 얼굴이 없다. 등을 보이고 있거나 어둠 속에 있다. 이것도 의도적인 선택이다. 병사 개인이 잔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대표하는 권력 구조와 시스템이 잔인한 것이라는 메시지다.

동시에 이 익명성은 다른 방향으로도 읽힌다. 그 총을 쥔 사람이 누구든 될 수 있다는 것. 명령을 받아 실행하는 메커니즘.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을 고야는 1814년에 이미 그림으로 보여줬다.

총살 부대와 희생자 사이의 거리가 가깝다. 거의 포인트블랭크에 가깝다. 이 거리는 현실적이다. 총살 처형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고야는 그 불편한 현실을 그대로 그렸다. 영화적 거리나 서사적 안전거리를 두지 않았다.

9. 〈전쟁의 참화〉. 연장된 이야기

José Costa y Bonells (died l870), Called Pepito

고야는 〈1808년 5월 3일〉 외에도 스페인 독립 전쟁을 주제로 한 판화 연작 〈전쟁의 참화(Los Desastres de la Guerra)〉를 남겼다. 82점의 판화가 전쟁의 잔혹함, 기근, 민간인 학살을 담고 있다. 이 판화들은 고야가 살아있는 동안 출판되지 않았다. 사후 35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나왔다.

판화 속 이미지들은 더 노골적이다. 시체 더미, 강간, 임시 처형. 이것들은 전쟁 선전이 아니었다. 고야는 영웅이 없는 전쟁을 기록했다. 양측 모두 잔인했고, 민간인은 그 사이에서 죽었다. 이 판화들이 발표됐을 때 비평가들은 충격을 받았다.

고야의 시각은 현대 전쟁 사진의 원형이다. 로버트 카파, 닉 우트, 케빈 카터. 전쟁의 참혹함을 그대로 기록하여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계속된다. 하지만 그 논쟁의 출발점에 고야가 있다.

9. 고야의 이 그림이 현대 전쟁화에 미친 영향

〈1808년 5월 3일〉은 이후 수많은 전쟁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은 구성부터 고야의 이 그림을 참조했다. 총살 장면, 대비되는 조명, 군중. 마네는 이것을 인정했다.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도 같은 계보에 있다.

고야가 확립한 것은 전쟁의 영웅성 대신 전쟁의 폭력성을 그리는 방식이었다. 이전까지 전쟁화는 승리와 용기를 그렸다. 패배와 공포, 무고한 죽음을 이 규모로 다룬 것은 고야가 처음이었다. 그것이 현대적이다. 전쟁 보도 사진의 윤리와 같은 선상에 있다.

프라도 미술관에서 실물을 보면 그림의 크기가 먼저 압도한다. 흰 셔츠 남자의 공포에 가득 찬 눈. 그것이 이 그림 전체를 끌어당기는 중심이다. 나는 이 남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고야도 몰랐을 것이다. 그것이 이 그림의 보편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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