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게르니카라는 마을
2. 피카소가 파리에서 이 소식을 들었을 때
3. 그림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4. 왜 흑백인가
5. 이 그림이 스페인으로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
▲ 파블로 피카소, 〈과학과 자선〉(Ciencia y Caridad), 1897년,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피카소 15세 작)
1937년 4월 26일 오후 4시 30분.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게르니카 상공에 독일 공군기 수십 대가 나타났다. 3시간에 걸쳐 폭탄을 투하했다. 마을 중심부 건물의 70% 이상이 무너졌다. 민간인 사망자 수는 150명에서 1600명 사이로 추정된다. 지금도 정확한 숫자를 모른다.
이 공습은 스페인 내전 중 프란시스코 프랑코 독재정권을 지원한 나치 독일의 작전이었다. 전쟁 기술 실험이기도 했다. 도시 무차별 폭격의 가능성을 시험한 것이다.
게르니카라는 마을
게르니카는 바스크 문화의 중심지였다. 스페인 전통에서 바스크 지방의 참나무. '게르니카코 아르볼라'. 가 있는 곳이다. 스페인 왕들이 바스크 자치권을 약속하던 상징적 나무였다.
폭격 당일은 장날이었다. 주변 농촌에서 주민들이 모여든 날이었다. 그래서 희생자가 더 많았다.
공습 다음 날, 기자들이 도착해 폐허를 기록했다. 사진과 기사가 전 세계로 퍼졌다. 파리에도 전해졌다.
피카소가 파리에서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당시 파리 그랑드-오귀스탱 가에 있는 작업실에 있었다.
스페인 공화국 정부는 이미 1937년 초에 피카소에게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관 벽화를 의뢰해 놓은 상태였다. 아이디어를 구상 중이던 피카소는 게르니카 소식을 듣고 주제를 바꿨다.
4월 말부터 6월까지 약 5주 동안 그렸다. 가로 776cm, 세로 349cm. 사진작가 도라 마르가 작업 과정을 43장의 사진으로 기록했다. 덕분에 그림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단계별로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례가 됐다.
피카소는 이 그림에 대해 "이건 내가 그린 게 아니다. 폭격이 그렸다"고 말했다.
그림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그림 왼쪽에 황소가 있다. 오른쪽으로 갈수록 울부짖는 말, 아이를 안고 비명을 지르는 여자, 쓰러진 병사, 도망치는 사람들이 있다. 화면 상단 중앙에는 전구 하나가 달린 램프가 공간을 밝히고 있다.
명확한 서사는 없다. 시간 순서도 없다. 모든 고통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황소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피카소는 묻는 사람마다 다른 답을 했다. "황소는 야만성이다" "황소는 스페인이다" "그냥 황소다." 의도적으로 확정하지 않은 것이다. 보는 사람이 채우도록.
왜 흑백인가
완성된 그림은 흑백과 회색뿐이다. 이전 스케치 일부에는 색이 있었다. 피카소가 의도적으로 지웠다.
이유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다. 폭격 당시 신문 사진이 흑백이었기 때문에 그 이미지를 따랐다는 설. 색이 있으면 전쟁의 구체적 공포가 미적 아름다움으로 중화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는 설.
어느 쪽이든, 흑백이기 때문에 이 그림은 특정 시대의 기록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상징이 됐다. 특정 국적의 민간인 학살이 아니라 전쟁 자체의 부조리가 됐다.
이 그림이 스페인으로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
피카소는 프랑코 독재 정권이 끝날 때까지 이 그림을 스페인으로 보내지 않겠다고 공표했다.
박람회 이후 그림은 피카소의 요청으로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 보관했다. 1939년부터였다.
프랑코는 1975년에 죽었다. 스페인이 민주주의로 전환한 것을 확인한 뒤, 1981년 피카소의 유언에 따라 그림은 마드리드로 옮겨졌다. 완성된 지 44년 만이었다.
지금은 마드리드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Museo Reina Sofía)에 있다. 별도 전시실에 방탄유리 없이 보관된다. 가까이서 볼 수 있다. 776cm짜리 그림을 정면에서 마주하면 그 크기가 다르게 느껴진다.
게르니카 마을은 재건됐다. 폭격 직후 사진과 재건 이후 사진을 비교하면 놀라울 정도로 달라졌다. 마을은 살아남았다.
마을은 재건됐다. 폭격 직후 사진과 지금 사진을 비교하면 놀라울 정도다. 근데 그 흑백 그림은 재건이 안 된다. 그냥 그대로 남아 있다.
※ 이미지 참고
- Guernica, Pablo Picasso, 1937, Museo Reina Sofía, Madrid. 저작권 관계로 이미지 미게재 (작품 사진: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 공식 웹사이트 참고)
관련 글: [클림트의 키스. 황금빛 연인의 정체](링크) | [베르메르의 진주 귀고리 소녀](링크)
6. 게르니카가 태어나기까지. 제작 과정의 기록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제작하는 45일 동안 45장의 습작을 남겼다. 이것은 이례적인 기록이다. 대부분의 화가들은 완성작만 남기고 과정은 남기지 않는다. 피카소는 날짜를 적어가며 모든 습작을 보존했다. 그 덕분에 이 그림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단계별로 볼 수 있다.
초기 습작에는 말과 황소 외에 주먹을 쥔 인물, 날아가는 비행기 등 다양한 요소가 포함됐다가 제거됐다. 피카소는 처음에는 폭격기를 그려 넣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지웠다. 가해자를 직접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그림의 힘을 약화시킨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최종 게르니카에는 가해자가 없다. 폭탄도 없고, 군인도 없고, 적도 없다. 오직 피해자들만 있다. 이 선택이 게르니카를 특정 전쟁의 기록이 아니라 모든 전쟁의 참상으로 만들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폭격 피해를 봐도 게르니카가 떠오르는 이유다.
7. 뉴욕에서 마드리드로. 그림의 귀환 이야기
게르니카는 완성 직후 파리 만국박람회에 전시됐고, 이후 피카소의 요청에 따라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맡겨졌다. 피카소의 조건은 하나였다. 스페인에 민주주의가 회복될 때까지 뉴욕에 있어야 한다는 것. 프랑코 독재 정권 하의 스페인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피카소는 1973년에 사망했고 그림은 여전히 뉴욕에 있었다.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고 스페인이 민주화됐지만, 그림의 귀환은 바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MoMA와 스페인 정부 사이에 오랜 협상이 이어졌다. 결국 1981년, 게르니카는 마드리드로 돌아왔다. 완성된 지 44년 만이었다.
지금 게르니카는 마드리드 소피아 왕비 예술 센터에 전시되어 있다. 별도의 방에 홀로 걸려 있으며, 방탄유리 뒤에 보호되어 있다. 그 방에 들어서는 순간 그림이 얼마나 큰지가 실감난다. 가로 7.76m, 세로 3.49m. 실물을 보기 전까지는 그 크기가 주는 압도감을 상상하기 어렵다.
8. 흑백이라서 더 강한 그림
게르니카는 흑백이다. 검정, 흰색, 회색만 사용됐다. 피카소는 왜 색을 쓰지 않았을까. 당시 신문 사진들이 흑백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게르니카 폭격 소식도 흑백 사진과 함께 전 세계에 전해졌다. 피카소가 그 매체의 시각 언어를 그림에 가져왔다는 해석이다.
또 다른 해석은 색이 없을 때 고통이 더 직접적으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붉은 피를 그렸다면 그것은 특정 장면의 묘사가 된다. 흑백으로 처리했을 때 고통은 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된다. 어떤 피, 어떤 상처가 아니라 고통 자체가 된다.
나는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 색이 없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야 의식했다. 그림이 워낙 강렬해서 색의 부재를 인식하기 전에 이미 내용에 압도됐기 때문이다. 색이 없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을 때, 그것이 의도적 선택이라는 것도 납득이 됐다. 흑백이기 때문에 이 그림은 특정 시대의 기록이 아니라 영원한 반전(反戰) 선언으로 남을 수 있었다.
9. 게르니카 도시의 현재
게르니카는 오늘날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로 살아있다. 1937년 폭격으로 도시의 많은 부분이 파괴됐지만, 게르니카나 수목(Gernikako Arbola)은 살아남았다. 바스크인들의 자유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이 참나무 아래에서 역사적인 자치 집회가 열렸다.
도시에는 피카소 광장이 있고, 게르니카 평화박물관이 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이 도시에 없다. 그림은 마드리드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에 있다. 그러나 박물관에는 게르니카를 재해석한 타피세리(tapestry) 복제본이 전시되어 있다. 그림이 없는 도시에 그 그림의 이름이 있는 것. 이것 자체가 역사의 아이러니다.
10. 피카소의 '이것을 한 것은 너다'
피카소가 파리 나치 점령 시기에 게슈타포 장교에게 게르니카 복제물 엽서를 보여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장교가 "이걸 당신이 그렸나?"라고 물었다. 피카소는 "아니오, 당신이 그렸소"라고 답했다. 이 일화의 진위는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말은 게르니카가 무엇인지를 가장 잘 요약한다.
폭력을 저지른 자들이 그 폭력을 그림으로 만들었다는 것. 피카소는 기록자가 아니라 증인이었다. 증인의 역할은 일어난 일을 세상이 기억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게르니카는 그 일을 1937년부터 지금까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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